부쉬밀 12년은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아이리시 위스키다. 평소 스카치 위주로 마시다 보니 아이리시는 거의 손을 안 대는 편인데, 온누리상품권 할인으로 6만원대에 살 수 있어서 한 번 들여봤다. 첫인상은 향이 꽤 좋다는 쪽이었다. 문제는 맛과 피니시가 그 기대를 따라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부쉬밀은 북아일랜드에 있는 증류소고, 1608년에 면허를 받아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가 증류소”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고 한다. 12년은 40% ABV에 부쉬밀 싱글몰트 라인업의 엔트리에 해당하는 병이다. 캐스크 구성이 좀 특이한데, 버번과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한 뒤 마르살라 와인 캐스크로 6~9개월 피니싱을 한다. 이 마르살라 피니시가 부쉬밀 12년의 시그니처다.
아이리시 위스키는 보통 스카치보다 부드럽고 가벼운 쪽으로 분류된다. 부쉬밀은 3회 증류를 거쳐 매끈한 스피릿을 만들고, 여기에 셰리+마르살라 피니시를 얹어 과일 방향으로 조금 더 밀어낸 구성이다. 스카치 위주로 마시던 입에는 꽤 가볍게 느껴질 수 있다.

테이스팅 노트
향 (Nose)
이 위스키의 가장 강한 무기다. 사과랑 배 같은 과일향이 또렷하게 올라온다. 프루티하면서 동시에 몰티한 곡물향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데미소다 같은 청량감이 살짝 얹힌 느낌이다. 코를 더 깊이 박으면 약한 아세톤 뉘앙스도 스치는데,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고 어린 증류주 특유의 그것에 가깝다. 향만 맡으면 “이거 꽤 물건인데?” 싶은 기대가 생긴다.
맛 (Palate)
여기서부터 아쉽다. 입에 넣으면 몰트의 단맛이 먼저 올라온다. 뒤로 건과일 뉘앙스가 따라오는데, 셰리와 마르살라 캐스크의 흔적이다. 스파이스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전반적으로 묽다. 그냥 묽은 게 아니라 “물 탄 위스키” 같은 느낌이 살짝 드는데, 40도라는 도수가 여기서 발목을 잡는다. 바디감이랑 밀도감이 둘 다 낮다. 향에서 받은 기대를 맛이 못 따라간다.
물을 몇 방울 더 넣어봐도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원래 40도 위스키에 물까지 더하면 캐릭터가 더 옅어지는 게 당연한데, 부쉬밀 12년은 그 구간이 짧다. 하이볼로 말아봤는데 이건 오히려 괜찮은 편이다. 탄산 위로 사과·배 과일향이 살아나면서, 니트에서 약하게 느꼈던 마르살라 피니시가 조금 더 드러난다. 니트보단 하이볼 쪽이 이 병에 맞는 방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니시 (Finish)
피니시는 짧다. 40도 위스키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 다만 짧은 와중에도 부드럽고 달콤한 결이 남고, 끝에 셰리 노트가 살짝 스치고 사라진다. 거슬리거나 불쾌한 마무리는 아닌데, 그렇다고 인상에 남지도 않는다. 맥캘란 12년 셰리 오크나 아란 셰리 캐스크 스트렝스처럼 셰리가 묵직하게 깔리는 위스키들이랑 같은 캐스크 카테고리로 묶기엔 무리가 있다.
정리
향은 좋다. 가격대 대비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 근데 위스키는 결국 입에 넣고 삼키는 술이니까, 맛이랑 피니시가 안 받쳐주면 인상이 깎인다. 부쉬밀 12년이 딱 그렇다. 향이 좋아서 기대치가 올라가버리는, 좀 손해 보는 구조다.
온누리 적용으로 6만원대에 샀으니 가격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데, 손이 자주 갈 병은 아니다. 아이리시 위스키 입문용으로는 무난한 선택이지만, 다 마시고 나면 나는 아마 또 라가불린 16년 같은 묵직한 스카치로 돌아갈 것 같다. 부쉬밀 12년을 다시 살 가능성은 낮다.
내 인상은 향 4점 / 맛 2점 / 피니시 2점 정도다. 향에서 받은 기대를 맛이 꺾어버리는 구조가 계속 반복되니까 한 잔이 금방 지루해진다. 3회 증류의 부드러움과 40도 병입이 만나면서 밀도를 너무 많이 잃은 쪽으로 느껴졌다. 차라리 같은 부쉬밀이라도 블랙부시 쪽이 더 맞을지 다음에 비교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