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디캔터 세트로 6만원 후반대에 들였다. 사실 위스키 입문을 조니워커 블랙으로 했었는데, 그때 블랙에 크게 데인 기억이 있어서 살까 말까 고민을 꽤 했던 술이다. 근데 지금 그린을 마시면서 드는 생각은, 이만한 가성비가 또 어디 있나 싶을 정도다. 뚜따한지 두 달 좀 넘은 지금,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조니워커 라인업 중에 그린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조니워커 라인 중에 유일한 블렌디드 몰트라고 한다. 그레인 위스키를 섞지 않고 디아지오 산하의 싱글몰트 네 개 - 탈리스커, 쿨일라, 크라겐모어, 링크우드 - 를 묶었고, 모두 15년. 43% ABV. 블랙(블렌디드)과는 아예 분류가 다른 병인 셈이다. 정가는 8~9만원대인데, 명절 디캔터 세트로 풀릴 때 6만원 후반대까지 떨어진다.

테이스팅 노트
향 (Nose)
풀냄새가 먼저 온다. 갓 깎은 잔디 같은 싱싱한 그린 노트. 그 뒤로 진한 몰트향이 묵직하게 깔리고, 허브랑 약간의 스모크가 슬쩍 비친다. 피트라기보단 모닥불 끄트머리 같은 은근한 스모크. 코를 너무 박지 말고 살짝 거리를 두고 맡으면 풀과 몰트가 동시에 열리는 느낌이 좋다.
맛 (Palate)
입에 넣으면 의외로 피트가 먼저 인사한다. 강하진 않은데 분명히 있다. 쿨일라랑 탈리스커가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바로 든다. 그러다 몰트의 단맛이 따라 들어오는데, 이 단맛이 끈적한 셰리 단맛이 아니라 곡물 자체의 단맛이라 깔끔하다. 아일라 위스키 라이트 버전 같은 맛이다. 43도라 부담도 적다.
피니시 (Finish)
우드 향이 길게 남는다. 스모크가 끝까지 따라오는데 거칠지 않고 부드럽다. 여운이 생각보다 길다. 두 달 넘게 열어둔 병이라 그런지 스파이스는 거의 사라지고 부드러움만 남았는데, 이게 오히려 그린의 진가다 싶다.
입문용은 블랙보다 그린이라고 본다
흔히 위스키 입문은 조니워커 블랙으로 하라고들 한다. 근데 내 생각엔 그린이 더 낫다. 블랙은 그레인이 섞여 있어서 가벼운 대신 어딘가 두루뭉술한 느낌인데, 그린은 싱글몰트 네 개로만 만들어서 몰티함이 폭발한다. 싱글몰트 안 부럽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위스키의 “진짜 향”이 뭔지 처음 느끼기엔 그린 쪽이 낫다. 피트도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라 아일라 위스키 입구에 발만 살짝 담그는 용도로도 좋다. 라가불린 16년이나 아드벡 우거다일처럼 본격적인 피트로 가기 전 단계로도 잘 어울린다.
가격도 정가 8~9만원이면 같은 가격대 싱글몰트 12년들과 붙여놔도 안 밀린다. 명절 디캔터 세트로 6만원 후반대에 잡으면 거의 사기 수준.
두 달 후의 그린
뚜따한지 두 달이 좀 넘었는데 변화가 꽤 흥미롭다. 처음 깠을 땐 스파이스가 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안 남아있다. 그 자리에 부드러움이 들어찼다. 은근한 스모크는 여전히 살아있고, 오히려 더 또렷해진 느낌이다. 탈리스커의 영향이 클 것 같긴 하다. 후추 같은 자극은 빠지고, 해풍 비슷한 미네랄 노트는 남았다.
병을 빨리 비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린은 천천히 마셔도 된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동글동글해진다.
조니워커 그린에 어울리는 안주
- 훈제 연어 - 그린의 은근한 스모크와 연어의 훈연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풀 노트가 연어 기름의 묵직함을 잡아준다. 원래 스모키/피트에는 회같은 날것이 정석
- 숙성 체다 치즈 - 몰트의 곡물 단맛이 치즈의 짭짤함과 만나면 단순한데 잘 떨어지지 않는 페어링이 된다
명절에 가볍게 집은 한 병인데 결과적으로 가장 손이 자주 가는 자리에 놓였다. 6만원 후반대에 이 만족도면 더 할 말이 없다. 정가에 사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다음 디캔터 시즌이 오면 그때도 그린 한 병은 또 챙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