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에 친구가 들고 온 병이다. 위스키 좋아하는 거 아니까 골라왔다는데, 우드포드 리저브(Woodford Reserve). 잔세트까지 같이 챙겨왔다. 750ml, 43.2% ABV. 이 도수부터 좀 특이하다. 40%도 아니고 45%도 아니고 43.2%. 프루프로 환산하면 90.4 프루프인데, 찾아보니 우드포드 리저브 증류소가 19세기 후반부터 사용해온 전통적인 병입 도수라더라.
버번을 포트 스틸로 증류하는 건 꽤 독특한 방식이다. 켄터키주 버사유에 있는 우드포드 증류소는 구리 포트 스틸에서 3회 증류한 원액을 컬럼 스틸 원액과 블렌딩하는데, 찾아보니 포트 스틸의 묵직한 바디감과 컬럼 스틸의 깔끔함이 합쳐지는 구조라고 한다. 호밀 18% 매시빌이라 스파이시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마셔보면 부드러움이 압도적으로 앞선다. 모기업은 브라운 포먼, 잭 다니엘과 같은 회사.
우드포드 리저브 테이스팅 노트

향
바닐라인데, 결이 좀 다르다. 버번이면 당연히 바닐라가 나오지만 우드포드의 건 뭔가 다르다. 납 크릭이나 와일드 터키 같은 버번의 묵직한 바닐라와 달리, 꿀을 섞은 듯 가볍고 둥근 느낌의 바닐라다. 그 뒤로 오크의 우디한 향이 은은하게 깔리고, 살짝 꽃 같은 뉘앙스도 스친다. 43.2%라서 알코올 자극은 거의 없다. 코를 가져다 대도 편안하다.
맛
부드럽다. 마시자마자 확실하다. 바닐라의 달콤함이 혀 위로 퍼지면서 체리, 건과일의 은은한 과일감이 함께 온다. 시트러스의 산미가 살짝 끼어드는데,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구석이 하나도 없다. 레어 브리드의 58%나 납 크릭의 50%에 익숙해진 입에는 타격감이 확실히 약하다. 근데 이게 단점이라기보다, 우드포드가 지향하는 방향 자체가 다른 거다. 고도수의 펀치가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승부하는 버번.
물을 넣으면 이미 부드러운 게 더 부드러워져서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 니트로 충분하고, 온더락이나 하이볼로도 잘 어울린다.
피니시
바닐라와 오크의 따뜻한 여운이 남는다. 길이는 중간 정도. 스파이스가 후반에 살짝 고개를 드는데 크게 존재감을 주장하진 않고,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마무리된다. 고도수 버번처럼 목을 타고 화끈하게 내려가는 느낌은 없다. 편안하게 한 잔, 또 한 잔 손이 가는 스타일.
43.2%라는 도수에 대해
솔직히 요즘 고도수 버번을 많이 마셔서인지, 43.2%는 좀 아쉽긴 하다. 같은 가격대에 50% 이상인 납 크릭 9년이나 러셀 리저브 싱글배럴이 있으니까. 그런데 우드포드 리저브의 43.2%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는 도수라고 하고, 실제로 이 도수에서 포트 스틸 블렌딩의 부드러운 질감이 가장 잘 살아난다. 우드포드는 처음부터 부드러운 버번을 만들겠다고 설계한 병이고, 43.2%가 그 의도에 딱 맞는 도수라는 느낌이다.
우드포드 리저브에 어울리는 안주
- 치즈 플래터(브리, 꿀 곁들임) - 버번에는 고기라고들 하지만, 우드포드는 43.2%의 부드러운 버번이라 굳이 고기가 아니어도 된다. 크리미한 브리 치즈에 꿀을 살짝 뿌린 조합이 우드포드의 바닐라, 꿀 풍미와 잘 맞는다
- 다크 초콜릿 - 건과일 뉘앙스와 카카오의 쓴맛이 어울리는 무난한 페어링
결국
선물용으로는 거의 반칙 수준. 디자인도 고급스럽고, 맛도 누구에게나 거부감 없이 부드럽다. 위스키를 잘 모르는 사람한테 줘도 “이거 괜찮다” 소리가 나올 만한 접근성이 있다. 반대로 고도수 버번에 길든 사람한테는 좀 심심할 수 있는데, 그건 취향 차이지 우드포드의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와일드 터키 레어 브리드나 납 크릭 9년 같은 고도수 버번을 마시다가 가끔 편하게 한 잔 하고 싶을 때 손이 가는 병이기도 하다. 하이볼 베이스로도 괜찮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