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라 위스키라고 하면 보통 라프로익이나 라가불린 같은 피트 폭격을 떠올린다. 부나하벤 12년은 그 통념을 정면으로 비킨다. 같은 섬에서 만들어졌는데 피트가 거의 없다. 처음 잔을 들었을 땐 “아일라가 맞나?” 싶은데, 두세 번 마시다 보면 다른 결로 아일라가 들어와 있다는 게 보인다.
같은 섬, 다른 출발점
부나하벤(Bunnahabhain)은 아일라 최북단, 마거데일 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1881년에 세워졌고 게일어로 “강의 입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른 아일라 증류소들이 피트 깔린 토양을 거친 물을 그대로 쓰는 것과 달리, 마거데일 강의 수원은 바위층을 통과해서 흐른다. 그래서 물 자체에 피트 영향이 거의 없다. 피트를 빼는 게 자연스러운 출발점이었다.
피트가 빠진 자리는 다른 게 메운다. 거친 해안가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숙성되는 동안 캐스크에 소금기와 미네랄감이 스며든다. 셰리 캐스크에서 오는 과일의 단맛이 그 위에 얹힌다. 피트가 만들어주는 깊이를 바다와 셰리가 분담하는 구조다.
2010년의 방향 전환
지금의 12년은 2010년에 비냉각 여과ㆍ무착색으로 리뉴얼된 버전이다. 그 전까지는 냉각 여과에 인공 착색까지 거쳤다고 한다. 비냉각 여과로 바꾸면서 도수도 46.3%로 올렸고, 평가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부나하벤이 자기 색을 정리한 시점이 2010년이라는 얘기가 그래서 자주 나온다.
마셔본 결

향
바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가장 먼저 올라오고 가벼운 과일 향이 뒤를 받친다. 셰리 캐스크에서 온 달콤함은 은근히 깔린 정도. 헤이즐넛의 고소함이 꽤 뚜렷하게 잡힌다. 시간을 두고 다시 맡으면 말린 허브, 가벼운 꿀 같은 게 나타나는데, 피트가 없어서인지 향들이 가려지지 않고 하나씩 또렷하게 분리돼서 올라온다.
맛
가볍고 깨끗한 몰트 캐릭터가 먼저 들어온다. 그 위로 건과일과 헤이즐넛의 고소함이 퍼진다. 해양성 소금기가 배경처럼 깔려 있다 보니, 바닷가에서 과일을 베어무는 듯한 - 좀 과장이 있지만 - 그런 인상이 든다. 셰리의 단맛은 절제돼 있다. 단맛이라기보다 잘 익은 과일 자체의 단맛에 가깝다. 내 입맛엔 복잡하게 이것저것 얹지 않고 좋은 재료의 맛을 그대로 보여주는 스타일로 읽힌다.
피니시
길이는 미디엄, 마무리는 깔끔. 견과류의 고소함이 가장 오래 남고 은은한 소금기와 과일의 잔향이 따라간다. 몰트의 단맛이 마지막에 살짝 올라오면서 다음 한 잔이 자연스럽게 따라지는 타입이다. 음식과 같이 마실 때 음식 맛을 가리지 않는 피니시라서, 식사 자리에 올려도 부담이 없다.
부나하벤 라인업 안에서
부나하벤은 논피트를 중심에 두면서 피티드 라인까지 함께 만든다. 12년이 간판이고, 18년ㆍ25년이 셰리 비중을 더 높인 프리미엄 라인이다. 스티위레이더(Stiuireadair)는 NAS 셰리 위주로 가성비 입문 라인 자리에 있고, 토이체 아 가(Toiteach A Dha)는 피트와 셰리를 같이 넣어 부나하벤 안에서도 피티드 캐릭터가 보고 싶을 때 집어드는 자리에 있다. 자기 정체성(논피트)에서 한 발도 안 비키면서 라인업으로 보완을 거는 구조가 보인다.
활용 폭이 의외로 넓다
내 입장에서 부나하벤 12년의 가장 큰 장점은 활용도다. 니트로 마시면 위에 적은 결을 다 따라갈 수 있고, 하이볼로 만들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해양성 미네랄감이 탄산과 잘 붙고, 46.3%에 비냉각 여과라 얼음을 넣어도 풍미가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트레이더스에서 7만 중반에 떨어져 있어서 한 병 사 왔는데, 활용도 생각하면 이 가격은 거의 반칙 같다.

피트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아일라를 통째로 거르는 사람한테 “이런 아일라도 있다”고 건넸을 때 반응이 좋았다. 입문 추천 1순위 자리에 두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