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나흐 배치 84는 처음부터 편하게 마시려고 꺼낸 병은 아니었다. 마포글로벌마트에서 14만 중반에 데려와 한참을 미뤄둔 거다. 61.2%라는 숫자가 먼저 보였고, 그 다음에 셰리 캐스크 특유의 진한 색이 보였다. 한 모금 마셔보니 “셰리 폭탄”이라는 말이 왜 붙는지는 알겠는데, 동시에 이걸 매번 그렇게만 부르면 글이 너무 쉬워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엔 도수부터 신경 쓰였다
캐스크 스트렝스 위스키는 좋을 때는 풍미가 선명하지만, 안 맞으면 알코올이 먼저 튄다. 아부나흐는 그 경계에 있는 병처럼 느껴졌다. 진한 건과일과 초콜릿이 확 올라오는데, 도수도 같이 밀고 들어온다.
아벨라워(Aberlour)는 스페이사이드 쪽 증류소고, 아부나흐(A’bunadh)는 게일어로 “근원(The Original)”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올로로소 셰리 버트만 쓰고 캐스크 스트렝스로 병입하는 시리즈다. 배치 84는 약 61% ABV로 나왔는데, 이 숫자를 알고 마시면 아무래도 몸이 먼저 긴장한다.
찾아보고 나서야 이해된 부분
찾아보니 스페인 헤레스산 퍼스트 필 올로로소 셰리 버트를 쓰고, 냉각 여과와 인공 착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배치마다 도수와 맛의 결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이 시리즈의 특징이다. 그래서 아부나흐는 하나의 고정된 맛이라기보다, 배치별로 다른 셰리 캐스크 실험처럼 받아들이는 쪽이 더 맞는 듯하다.
라인업 표보다 배치 차이가 먼저 보인다
아벨라워의 정규 라인업은 더블 캐스크 시리즈와 아부나흐 쪽으로 나눠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라인업 전체보다 아부나흐가 왜 따로 노는 병처럼 느껴지는지가 더 중요했다.
| 제품 | 캐스크 | 도수 | 특징 |
|---|---|---|---|
| 12년 더블 캐스크 | 셰리 + 버번 | 40% | 대중적 데일리 |
| 12년 논칠필터드 | 셰리 + 버번 | 48% | 비냉각 여과, 셰리 캐릭터 풍부 |
| 16년 더블 캐스크 | 셰리 + 버번 | 40% | 더 깊고 복합적 |
| 18년 | 셰리 + 버번 | 43% | 오랜 셰리 숙성의 결과물 |
| 아부나흐(A’bunadh) | 올로로소 셰리 버트 100% | 배치별 60%대 | NAS 캐스크 스트렝스, 오늘의 주인공 |
아부나흐 배치 84 테이스팅 노트
배치 84, 61.2% ABV.

향
크리스마스 케이크. 건과일이 잔뜩 들어간 그 진한 케이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다크 초콜릿, 체리, 오렌지 필의 시트러스함이 뒤를 따르고, 시나몬과 정향(clove)의 따뜻한 스파이스가 코끝을 자극한다. 61%라는 도수가 무색할 정도로 알코올의 자극이 의외로 크지 않다. 물론 도수가 도수이니 세게 들이마시면 알코올이 확 올라오긴 하는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맡으면 셰리의 진한 달콤함이 정말 풍성하게 펼쳐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올로로소 셰리 특유의 약간 건조한 견과류 향도 올라오는 게 좋다.
맛
입 안에서 다크 프루트가 폭발한다. 과장이 아니다. 무화과 잼, 에스프레소, 진저브레드의 풍미가 동시에 밀려오면서, 점성이 높은 묵직한 바디감이 입 안을 꽉 채운다. 갈색 설탕의 달콤함이 깊게 깔려있고, 가죽 같은 뉘앙스도 은은하게 스친다.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성격이 좀 바뀌는데, 강렬함이 약간 누그러지면서 오렌지, 건포도 같은 과일 노트가 더 선명하게 올라온다. 개인적으로 아부나흐는 원액 그대로 한 잔 비우고, 다음 잔은 가수해서 마시는 식으로 즐기는 걸 좋아한다. 같은 위스키인데 두 가지 다른 표정을 보여주거든.
피니시
길다. 따뜻한 여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몇 분이고 남아있다. 건과일의 단맛과 비터스위트 초콜릿의 씁쓸달콤함이 겹겹이 겹쳐지고, 오크 스파이스의 향신료 느낌이 뒤에서 잡아준다. 셰리의 온기가 위장까지 전해지는 느낌이 있는데, 겨울에 마시면 이 따뜻한 피니시가 정말 좋다. 캐스크 스트렝스답게 여운의 강도와 지속 시간 모두 개인적으로 꽤 인상적이었다.
아부나흐에 어울리는 안주
- 소고기 스테이크(립아이) - 캐스크 스트렝스의 강렬한 셰리 풍미가 지방 풍부한 스테이크와 균형을 잡는다
- 다크 초콜릿(카카오 70% 이상) - 아부나흐의 진한 건과일, 스파이스와 카카오의 쓴맛이 만나면 폭발적인 조합
아부나흐 배치 84는 셰리 캐스크의 장점과 부담을 동시에 안고 있다. 올로로소 셰리 버트의 진한 단맛은 좋았고, 캐스크 스트렝스 특유의 힘도 분명 매력적이었다. 다만 61%라는 도수는 아무 때나 편하게 꺼낼 성격은 아니다.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맞는 지점을 찾는 쪽이 나았다.
다음에 다시 마신다면 배치 82와 나란히 놓고 볼 듯하다. 같은 올로로소 셰리 버트라고 해도 풍미의 결이 꽤 다르게 느껴진다. 글렌드로낙이나 맥캘란처럼 더 낮은 도수의 셰리 캐스크 위스키와 비교하면 아부나흐의 힘이 더 잘 보이고, 같은 고도수 쪽에서는 글렌알라키 10년 CS와 비교해볼 만하다. 실제로 같은 카테고리의 아란 셰리 캐스크 CS와 한 자리에서 비교 시음도 해봤는데, 5만 원 가격 차가 한 잔의 정보량에서 그대로 갈렸다. 대만 쪽으로 넘어가면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쏘 같은 고도수 셰리도 있다. 셰리 캐스크 위스키에서 자주 겹치는 향과 맛은 셰리 캐스크 위스키 공통점 정리에 따로 모아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