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리 캐스크 위스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꽤 오래 전 일인데, 그 시작점이 바로 글렌드로낙이었다. 위스키를 막 마시기 시작하던 시절, 누군가 “셰리 캐스크를 제대로 알고 싶으면 글렌드로낙부터 가라”는 말을 해줬고, 실제로 12년 한 잔을 마셔보니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바로 이해가 됐다. 건과일이 잔뜩 들어간 크리스마스 푸딩을 한 입 베어 문 듯한 인상이었다. 그때부터 셰리 계열 위스키를 본격적으로 파게 된 계기가 됐다.
하이랜드 동쪽, 셰리 전담으로 가는 증류소
글렌드로낙은 1826년 하이랜드 동쪽 애버딘셔에 세워졌다. 버번 캐스크 위주로 가는 대부분의 증류소와 달리, 이 집은 올로로소와 PX 셰리 캐스크를 메인으로 쓴다. 현재 소유주는 브라운포먼인데, 그 전에 빌리 워커가 2008~2016년 운영하며 명성을 끌어올린 뒤 매각했다. 워커 본인은 이후 글렌알라키를 새로 인수해서 지금의 라인업을 만들고 있고. 동쪽 하이랜드는 원래 과일 풍미가 풍부하고 바디감이 묵직한 위스키를 만드는 지역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셰리 캐스크가 얹히면서 글렌드로낙의 캐릭터가 완성된다.
12년 오리지널은 이 집의 얼굴이다. PX와 올로로소 두 가지 셰리 캐스크를 같이 써서 이 증류소가 뭘 하는 곳인지 단번에 보여준다. 근데 “12년 오리지널”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구형은 워커가 직접 캐스크를 골라 병입하던 시절 물건이고, 2016년 브라운포먼 인수 이후 2019년경 리뉴얼을 거쳐 현행 버전이 나왔다. 구형을 마셔본 사람들은 셰리의 깊이에서 미묘한 차이를 느낀다고 해서, 단종된 지금도 콜렉터들 사이에서 계속 찾는 병이 되고 있다.
라인업에서 12년의 자리
글렌드로낙의 정규 라인업은 전부 셰리 캐스크 숙성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올라갈수록 셰리의 깊이가 한 층씩 더해지는 구조다.
| 제품 | 캐스크 | 도수 | 특징 |
|---|---|---|---|
| 12년 오리지널 | PX + 올로로소 셰리 | 43% | 이 집의 얼굴 |
| 15년 리바이벌 | PX + 올로로소 셰리 | 46% | 라인업 중 가성비 최고 |
| 18년 알라다이스 | 올로로소 셰리 | 46% | 풀바디 셰리 몬스터 |
| 21년 팔리아먼트 | PX + 올로로소 셰리 | 48% | 정규 라인업 최상위 |
글렌드로낙 12년 테이스팅 노트
이 집의 얼굴인 12년 오리지널을 뜯어보자.

향
코를 가져다 대면 바로 셰리다. 근데 맥캘란 12년 셰리 오크보다 좀 더 향긋한 쪽인데, 사과나 배 같은 밝은 과일이 먼저 올라오면서 산뜻한 인상을 준다. 건과일의 무거운 향보다 생과일에 가까운 밝은 달콤함이 앞에 서는 느낌이다. 좀 더 기다리면 토스티드 아몬드 향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오렌지 필의 상큼한 시트러스 뉘앙스도 살짝 잡힌다. 전체적으로 겨울에 벽난로 앞에서 크리스마스 푸딩을 먹는 것 같은, 그런 따뜻하고 포근한 향이다.
맛
향에서 느꼈던 사과, 배 같은 밝은 과일이 맛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스파이스는 맥캘란보다 약하게 들어온다. 질감이 꽤 오일리해서 입 안에서의 촉감이 좋고, 풀바디라고 해도 될 만한 무게감이 있다. 중반부터는 다크 프루트의 단맛이 조금씩 오크의 타닌으로 전환되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느낌이다.
43%라는 도수가 조금 아쉬울 수도 있는데, 사실 이 정도 도수에서 이 만큼의 풍미를 뽑아내는 건 꽤 대단한 거라고 본다. 물을 넣으면 오히려 셰리의 과일 느낌이 더 살아나기도 하니까, 니트로 한 잔 마시고 물 몇 방울 떨어뜨려서 한 잔 더 마시는 식으로 즐기는 걸 추천한다.
피니시
피니시에서 셰리의 잔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약간의 체리와 다크 초콜릿 뉘앙스가 입 안에 남으면서, 전체적으로 은근하게 퍼지는 느낌이 좋다. 삼킨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잔향이 머물러 있어서, 급하게 마시기가 아까워진다. 개인적으로 이 피니시를 천천히 음미하는 맛이 글렌드로낙 12년의 진짜 매력이다.
이 가격대에 셰리 깊이로 붙을 후보가 많지 않다. 맥캘란 12년 셰리 오크도 좋지만, 가격 차이를 생각하면 글렌드로낙 12년이 가성비에서는 확실히 앞선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두 병을 나란히 놓고 맛을 비교한 후기는 맥캘란 12 vs 글렌드로낙 12 비교에 따로 정리해뒀다. 비슷한 가격대에서 셰리 캐스크를 제대로 경험하고 싶다면 글렌파클라스 15년도 같이 비교해보면 좋다.
참고로, 이 위스키는 약간 따뜻한 환경에서 마시는 게 좋다. 손으로 글라스를 감싸서 살짝 온도를 높여주면 숨어 있던 건과일 향이 훨씬 풍성해진다. 우성그린마트에서 온누리상품권 끼워 8만 후반에 업어온 병인데, 따라보면 이 가격이 이래도 되나 싶은 순간이 가끔 온다.
여러 셰리 캐스크 위스키를 마시면서 느낀 공통된 풍미 패턴은 셰리 캐스크 위스키 공통점 정리에 따로 정리해뒀다.